전공의협의회, 원격의료 법안 반대성명
대한전공의협의회 제18기 집행부가 24일 보건복지부의 원격의료 추진에 대한 반대 성명서를 발표했다.
다음은 성명서 전문이다.
[성명서]
의료의 기본을 훼손하는 의사-환자 간 원격의료 법안 반대한다
보건복지부는 원격의료 추진을 중단하라
환자-의사간 원격의료를 허용하는 내용을 담은 의료법 개정안이 정기국회에서 논의될 전망이다. 보건복지부는 의협에서 시범사업에 참여하지 않자 9월 말부터 단독으로 시범사업을 진행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제 17기 집행부에서 2014년 2월 의료제도바로세우기 투쟁 당시부터 원격의료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이 입장은 현재 제 18기 집행부도 변함이 없다. 의대생들은 의과대학에서 무분별한 검사보다 한 번의 제대로 된 병력청취와 신체검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배운다. 환자를 보고, 청진하고, 만져보고 두드려보는 시진, 청진, 촉진, 타진은 의대생들이 배우는 신체검진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대면진료를 하지 않고는 환자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입원환자를 돌보는 주치의를 하면서 교수에게 꾸중을 듣는 것도 ‘왜 환자를 직접 보지 않았냐’는 것이고 응급실에서 문의전화를 받을 때에도 ‘병원에 오셔야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고 환자들에게 입이 아프도록 설명한다.
원격의료는 의사-의사간 정보 교환을 위해서는 유용하지만 의사-환자 간 진료에 있어서는 대면진료가 원활히 이루어지는 가운데 제한적이고 보완적으로만 사용해야 한다. 일본은 방사능 유출 사고 이후 의사-환자간 원격의료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환자가 한 의사에게 장기간 진료를 받았고 병세가 안정적이며 응급상황 시 바로 대응할 수 있는 의료서비스 환경이 구축된 경우에만 원격의료를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 정부가 추진하려고 하는 원격의료법은 그 대상이 만성질환자, 정신질환자, 도서산간벽지 등 광범위하고 기준도 애매하다. 게다가 2013년 기준 국내에서 응급의료기관이 전혀 없는 지자체가 25군데, 분만시설이 없는 지자체가 57군데다. 도서산간 지역의 응급후송 서비스도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한국에서와 같이 도서 산간 지역의 기초적인 의료 인프라가 공백인 상태에서 제대로 신체검진도 할 수 없는 원격진료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보건복지부는 거꾸로 원격진료를 “방문진료나 간호 등으로 보완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완전히 뒤바뀐 접근이다. 의료취약지 환자들에게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원격의료가 아니라 환자를 적절히 돌볼 수 있는 의료인력이다.
원격의료가 한국의 지리적 특성에 맞는지도 의문이다. 원격의료를 도입한 국가들의 1km2당 의사 수는 캐나다 0.01, 호주 0.01, 미국 0.08, 핀란드 0.05다. 한국은 0.98이다. 국내에서 원격의료에 대해 안전성과 효과성을 검증하기 위한 시범사업들이 있지만 대부분 기간이 6개월-1년 정도로 매우 짧고, 그 효과 또한 왜곡, 과장되어 발표되었다. 비용효과성은 제대로 검증된 바도 없다. 해외 학술지에서는 지난 20년 간 원격의료에 대한 연구를 검토한 결과 원격의료 고유의 효과성이 분명치 않다는 보고가 늘어나고 있으며, 비용 효과성 또한 검증되지 않았다는 연구결과들이 발표되고 있다.
그간 원격의료 시범사업은 삼성, SK, LG 등 대기업과 주요 대형병원들이 함께 진행해온 것이 대부분이다. 보건복지부는 원격의료를 의원 수준에서만 하고 병원급으로 확대할 계획은 없다고 하지만 병원들은 일부 의원과 연계하는 방식을 택할 수도 있고, 향후 영리자법인 설립이 허용되면 자회사 형식으로 원격진료센터를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도 대형병원 집중과 개원가의 위기는 심각하다. 2002년 요양급여 실적에서 병원과 의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50.7%, 49.3%였는데 반해 10년이 지난 2012년 그 비중은 병원 67.7%, 의원 32.3%로 격차가 벌어졌다. 2013년 상급종합병원 43곳 수입 8조 1583억 원 중 34%를 서울대병원, 서울성모병원, 삼성서울병원, 세브란스 병원 등 빅5 병원이 가져가고 있다. 지난 2011년 보건사회연구원이 원격의료 이용에 대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70.3%가 유명의사를, 63.2%가 대형병원을 이용하겠다는 답변을 했다. 의사-환자 간 원격의료는 결국 이미 네임밸류가 있는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환자 집중을 가속화할 것이다. 개원가의 몰락은 필연적이다.
김용익 의원은 심평원의 지역별 의원의 만성질환 내원환자수 자료에 산업통상자원부 원격진료 시범사업 결과를 적용해 분석한 결과 원격진료센터가 들어서면 해당 지역 만성질환자를 흡수해 주변 동네의원 1곳당 연간 수입이 3312만원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로 강원도에서 시범사업을 하는 동안 의원의 내원환자가 줄었다고 하며 원격의료의 도입으로 내과 전공의 지원율이 감소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개원가의 몰락은 비단 의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의원 수가 감소하면서 환자들의 지역 의료접근도가 떨어지는 문제로 이어지게 된다.
대형병원으로 환자가 몰리면서 대형병원이 고유하게 수행해야 할 중증 환자 진료 기능이 상대적으로 저해되고 전공의들의 업무 강도는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그동안 병원의 수익은 의원에 비해 월등히 더 많이 증가했지만 그것이 의사를 더 많이 고용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국민건강보험통계에 따르면 2004년에서 2012년까지 병원(상급종합병원, 종합병원, 병원 포함)의 급여실적은 8조원에서 22조원으로 2.8배 증가했지만 병원들에 고용된 레지던트는 1.3배, 전문의는 1.7배 증가했을 뿐이다. (같은 기간 의원의 요양급여실적은 1.7배 증가, 전문의는 1.3배 증가하였다).
의사-환자 간 원격의료 도입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의료전달체계 붕괴 때문만은 아니다. 2003년 삼성은 신성장동력사업으로 유헬스(u-Health)를 지목했고 2007년에 발간한 ‘유헬스의 경제적 효과와 성장전략’이라는 보고서에서 유헬스 활성화를 위한 선결 조건으로 영리병원과 의사-환자 간 원격의료 허용, 그리고 일반인이 운영하는 건강관리서비스회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유헬스 산업은 단지 현 의료제도 내에서 의료시장 일부를 확장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유헬스 산업은 만성질환자 외에도 건강한 사람에 대한 예방서비스까지 의사 주도가 아닌 기업 주도의 건강관리서비스업으로 재편하는 전략이다. 의사 혼자 운영하는 개원가는 더더욱 살아남기 힘들고, 더욱 더 많은 의사들이 기업의 입맛에 맞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에이전트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 희생되는 것은 의사의 자율성과 독립성, 양심적 진료다.
원격의료를 단지 환자들이 원격모니터링에 필요한 혈압, 혈당 측정기를 구입하고, 원하는 사람들만 이용하면 되는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10여년 전부터 원격의료와 유헬스를 구상해왔던 기업들은 다시 10년 후를 내다보며 병원-의료기기회사-의료보험회사 등 계열사들을 복합적으로 연계한 새로운 산업의 성장을 위해 의료환경의 재편을 꿈꾸고 있다. 정부는 그 꿈을 위해 적극 지원사격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 과정에 의학적인 효과성, 정책적 타당성, 비용효과성에 대한 진지한 검증은 온데 간데 없고 단지 그러한 기술 도입을 정당화하기 위한 왜곡되고 과장된 시범사업과 연구결과만이 남아있다. 이런 환경에서 의대생 때 밤새워 공부했던 지식은 적용할 데가 없다. 전공의들은 이제 후배 세대에게 수련을 받지 말고 경영을 공부하라고 조언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제 의사들이 교과서적 진료를 한다는 것은 점점 더 현실에서 멀어지는 꿈이 되고 있다. 만약 이런 상황에 의사들이 들고 일어서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희망이 없는 것이다. 전공의들은 환자의 편에 서서 양심적 진료를 하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울 것이다.
2014. 10. 24
대한전공의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