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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문가의 의학적인 판단을 무시하고, 권력과 여론의 압박에 굴복하여 판결을 내린 재판부의 결정을 규탄한다.

2019년 11월 28일


지난 26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8부는 故 백남기 농민의 유족들이 백선하 서울대 의대 교수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백 교수와 서울대병원에 4500만원 배상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고인의 사망 종류가 외인사임이 명백한데도 피고는 ‘병사’로 기재해 의사에게 부여된 합리적 재량을 벗어났고 사망진단서 작성에 있어 의사에게 요구되는 주의 의무를 위반했다”라고 밝혔다. 이에 백 교수 측 변호인들은 의학적 증거를 제출할 기회도 주지 않은 재판부의 결정에 강하게 항의하기도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한병원의사협의회(이하 본 회)는 재판부의 이번 판결은 전문가인 의사의 의학적인 판단을 무시하고, 권력과 여론의 압박에 굴복하여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것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이번 판결로 인해서 의료 현장에는 또 다른 문제들이 발생할 것으로 생각되어 재판부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

사망진단서는 환자의 사망원인에 대해서 그 환자의 치료를 맡았던 주치의가 의학적인 판단을 통해서 작성하는 문서이다. 환자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질병에 의한 것인지 사고 등의 외부적인 요인에 의한 것인지는 의사가 아니면 판단할 수 없다. 실제 의료 현장에서도 사망 원인을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기 때문에 결국은 주치의의 최종 판단을 존중한다. 결국 환자가 사망한 직접적인 원인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주치의이므로, 주치의가 전문적인 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한 사망진단서의 내용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 그런데 재판부는 철저히 전문가의 판단에 맡기고 존중해야 할 문제에 대해서, 정치적인 판단을 끌어들여 잘잘못을 따지면서 ‘사망진단서 작성에 있어 의사에게 요구되는 주의 의무 위반’이라는 황당한 이유를 들어 백 교수에게 배상책임이 있다고 판결한 것이다. 


재판부가 정치적인 판결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백 교수의 배상책임을 허위진단서 작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의 의무 위반으로 판결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재판부는 진단서 내용 자체에는 허위가 없으나, 여론과 정치권이 원하는 내용으로 진단서를 작성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주의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단하여 책임을 물은 것이다. 결국 재판부의 논리대로라면 의사들은 자신의 의학적 지식과 소신에 입각하여 진단서를 작성해서는 안 되며, ‘주의 의무’를 위반하지 않기 위해서 사회적 여론과 정치적인 문제까지 고려해서 진단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는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황당한 판결이며, 사법부가 전문가의 영역까지 침해하는 월권을 행사한 것에 다름 아니다.

재판부의 이번 판결은 단순히 판결 자체의 문제에만 그치지 않고, 의료 현장에서 또 다른 문제와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여 더욱 우려된다. 지금도 실손 보험과 관련하여 환자들의 무리한 서류작성 요구가 있는데 이러한 요구를 들어주면 자칫 보험사기에 연루될 수도 있고,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악성 민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작금의 대한민국 의료 현장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번 판결로 인해 의사가 자신의 의학적인 소신에 의거해서 진단서를 작성하여도 그 내용에 대해서 법적으로 다툴 여지가 생겨 버린 것이다. 결국 재판부의 정치적인 판결 하나 때문에 의료 현장에는 혼란이 가중되고, 법적 분쟁이 늘어나서 의사들은 수시로 법원 출입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현재 많은 전문가들과 국민들은 재판부의 경솔하면서도 정치적인 판결로 인해서 전문가들의 전문성이 침해되고, 사회 혼란만 가중되는 대한민국의 현주소에 대해서 절망감마저 느끼고 있다. 전문가들의 판단이 존중받고 법에 의한 처벌은 최소한으로 이루어지면서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가 진정 건전하고 발전 가능성이 높은 사회라는 사실을 사법부는 받아들여야 한다. 본 회는 ‘사망진단서 작성에 있어 의사에게 요구되는 주의 의무 위반’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백 교수에게 배상책임이 있음을 판결한 재판부의 결정에 유감을 표명하며, 절대로 받아들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향후 항소심 재판부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며, 또다시 재판부가 전문가의 판단을 무시하고 정치적인 판결을 내리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본 회는 이를 강력히 규탄하고 저항해 나갈 것임을 천명하는 바이다.


2019년 11월 28일
대한병원의사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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