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대한의학회 기획조정이사/서울의대 의료관리학]
불과 한 달 전에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중동에서 온 낯선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을 이처럼 헤집어 놓으리라고는 말이다. 이번 메르스 사태를 통해 우리는 매우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 메르스 바이러스에게 ‘낙타’보다 더 좋은 숙주는 ‘대한민국 보건의료체계’였다는 교훈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머나먼 중동에서 건너 온 바이러스가 단숨에 대한민국을 세계 2위의 메르스 환자 발생국에 올려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공중보건의에 의존하는 후진적인 방역체계, 거대한 다인실이 된 중환자실과 응급실로 상징되는 감염에 취약한 병원, 허약한 일차의료와 맞물린 국민의 병원쇼핑, 마지막으로 문병문화를 포함한 국민의 의료이용문화까지 우리나라 보건의료체계 전반이 메르스 확산에 기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6월 25일 “메르스 사태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의사협회와 의학회가 공동으로 주관한 이 토론회는 메르스 사태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나라 보건의료체계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의료관련감염관리학회와 예방의학회, 응급의학회를 포함한 여러 학회가 메르스 사태에서 드러난 우리나라 보건의료체계의 취약점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제시했다. 역학조사 전문인력의 양성과 배치, 질병관리본부의 강화, 병원감염관리에 대한 건강보험수가 인상, 일차의료의 강화를 포함한 다양한 논의가 이뤄졌다. 유래 없이 많은 청중과 언론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경청했다.
메르스 사태가 물밑에 잠겨있던 우리나라 보건의료의 해묵은 난제들을 수면위로 밀어 올려놓았다. 이제까지 국민과 정책결정자들이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아 어찌 보면 실현가능성이 높지 않은 공허한 논의를 반복해왔던 난제들이었다. 한 달 전만해도 동네 병의원을 중심으로 일차의료를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할 수는 있었지만, 정작 국민과 언론, 정책결정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병원감염관리에 관심을 둔 국민과 언론, 정책결정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현실적인 정책 대안을 논의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 위기가 곧 기회인 셈이다.
하지만 앞길이 녹록지 않을 것 같다. 우선 메르스 사태로 드러난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운 해묵은 난제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책적으로 실현가능하고 정치적으로 합의된 대안이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끝으로 대안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한 목소리를 내기 위한 의료계 내부의 리더십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최근 여기저기서 메르스 사태 이후에 우리나라 보건의료체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분주하다. 하지만, 너도나도 목소리를 높여서 이야기 하면 결국은 아무도 듣지 못하는 시장통 소음에 그칠 뿐이다. 우리 사회 전체가 아닌 소수의 이익만을 대변하거나, 보건의료계 내부의 갈등을 불러일으키거나, 소통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주장만을 고집하여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의사협회, 의학회와 회원 학회, 병원협회를 포함한 여러 주체들이 각자의 역할을 나눠 맡아 제대로 된 소리를 내는 합창단처럼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래야 국민과 정책결정자들에게 보건의료계가 생각하는 대안을 잘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통 소음에 목소리를 보태는 것은 의학회가 할 일은 아닐 것이다. 의학회가 의료계 내부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과정에 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보다는 학술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을 만드는 것이 우리 의학회의 역할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1) 회원 학회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2) 회원 학회의 문제의식이 정책 대안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조직적으로 뒷받침하고, 3) 공론의 장을 마련하여 회원 학회의 대안이 국민과 정책결정자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의학회는 지난 6월 중순에 회원 학회들에게 ‘메르스 사태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견조사를 이미 시행했다. 하지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욱 많다.
의학회가 제 역할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사협회가 우리나라 보건의료계를 대표하는 단체로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어떤 정책이든 ‘이익을 보는 집단’과 ‘손해를 보는 집단‘이 있기 마련이다. 보건의료계를 대표하는 단체로서 내부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성공적으로 조정해내지 못하면, 너도나도 목소리를 높여봤자 정작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시장통 소음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의학회는 의사협회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용한 조력자의 역할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와 함께 의학회는 국민이 보건의료계가 내놓은 대안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의사를 환자보다 자기 밥그릇을 중시하는 전문가라고 생각하는 국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의 의학회에 대한 신뢰를 자산으로 보건의료계가 내놓은 대안을 국민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한다. 메르스 사태로 소위 정책의 창(policy window)이 열렸다. 보건의료계가 단합하여 해묵은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계기로 삼기를 기대한다.
출처 ; 대한의학회 e-뉴스레터 No.62 (2015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