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집 [도깨비 국물]
산마을 펴냄
256쪽
1만5천원.
문의 (02) 866-9410
이메일 idgoodid@naver.com
조재오 교수(경희치대 구강병리과)가 그간 틈틈이 쓴 산문들을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조 교수가 엮은 ≪도깨비 국물≫은 오랜 세월 교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경험했던 다양한 내용들을 엮었다.
제1부 산문 13편의 소제목은 △Old Parr whisky의 추억 △WBM의 탄생 △결혼반지 △김치의 추억 △도깨비 국물 △두 번째 Baltimore 방문 △회한이 서린 동물실험의 추억 △새파란 노인의 넋두리 △우리 집의 늑대개 세 마리 △우리 집 늑대개의 일상 △울릉도 봉사활동 독도방문 회상 △경희대의 의전원, 치전원 전환 이야기 △치의학 산책 등이다.
그리고 2부는 음식탐구에 얽힌 이야기를 묶었다.
제2부 음식탐구에서 다룬 주제는 △복어 △낙지 △홍어 △도루묵 △매생이 △용봉탕 △추어탕 △애저탕 △백합 조개 △토하젓 △바지락 △보신탕 △참게 △우랑탕 △냉면 △꼬막 △빈대떡 △순대 △삼계탕 △웅어 △전복 △개성보쌈김치 △만두 △어복쟁반 등이다.
[머릿글]
조 교수는 ≪도깨비 국물≫을 펴내면서 글머리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공자님은 나이 일흔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를 넘어서거나 어긋나지 않았다(從心所欲 不踰矩)고 하셨지만 어찌하다 보니 벌써 칠순을 바라보는 저는 공자님 같은 분하고는 거리가 멀게 아직도 철없던 젊은 시절의 행동거지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간 치과의학을 전공하고 교직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수많은 인생의 전환점을 거쳐 왔고 고뇌하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돌이켜 보면 기쁨의 순간도 있었고 결단을 내려야하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래도 크게 인생의 순리를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아 왔다고 안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은사님들과 선배님들의 많은 지도와 격려의 말씀이 오늘의 저를 있게 했다고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면 삶이란 크게 절망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크게 희망을 가질 필요도 없이 그저 담담하고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보람된 일이 이루어지더군요.
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매일 매일의 기록을 남겨오고 있습니다. 지나간 기록을 차분한 마음으로 돌이켜 보면 보잘 것 없는 일에 쉽사리 흥분했던 저 자신이 부끄럽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그간의 마음을 정리하여 내일의 일을 계획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간간히 써온 글을 정리 해 보았습니다. 10년 쯤 전에 회갑을 맞이하여 그간 제가 걸어온 길을 정리해서 회고록으로 낸 이후에 다시 써본 글입니다. 대단한 문재(文才)도 없는 제가 글을 쓴다는 것이 쑥스럽기만 합니다. 그냥 자기 흥에 겨워 선무당이 칼춤을 추어본 것이지요.
이 책에 실린 글 중 일부는 신문에 연재했던 것들입니다. 마감에 쫓겨 쓴 글들이 많아 거칠기 짝이 없기도 하지만 하고 싶었던 말들도 많습니다. 낯선 공간을 이끌어 준 분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음식탐구를 통해 여러분들이 멋진 식도락가가 된다면 삶이 한층 더 풍요로워 지고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제 뜻이 아니듯이 이 세상을 하직함도 제 뜻은 아니지요. 저는 지금까지 한국인들의 평균수명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아 왔지만 얼마 일지 모르는 남은 삶을 희망과 열정을 가지고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맛보기] 도깨비 국물
樹州 卞榮魯의 <酩酊 四十年>이라는 수필을 보며 어쩌면 저리도 글을 맛깔스럽게 쓸 수 있을까 하고 웃음 짓던 생각이 납니다. 구한말의 명문 양반 댁 도령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정통 한학을 수학하고 대학에서는 영문학을 전공하여 영문학교수로서, 더구나 시인으로 동서양을 넘나드는 해학의 정신세계와 주생몽사로 좌충우돌의 일생을 보낸 그분의 일화는 보통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흔히 음주의 단계를 酒卒, 酒士, 酒桀, 酒豪, 酒仙, 酒神의 여섯 단계로 나눈다고 하는군요. 靑鹿派 시인 趙芝薰은 소문난 주당으로 술에 관하여 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그는 술을 마시는 품격과 격조에 따라 不酒, 畏酒, 憫酒, 隱酒, 商酒, 色酒, 睡酒, 飯酒, 學酒, 愛酒, 嗜酒, 耽酒, 暴酒, 長酒, 惜酒, 樂酒, 觀酒, 廢酒의 열여덟 단계로 나누었고 자신은 酒仙에 속한다고 지극히 자화자찬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酒神으로는 서양에서 그리스 신화의 Zeus와 Semele의 아들 Dionysus(로마식 이름 Bacchus)를 찾아 볼 수 있으나 동양에서는 특별히 주신으로 모시는 신은 듣지 못했습니다.
술을 좀 한다는 사람은 거개가 酒卒의 단계에서 끝나고 사람이 도달 할 수 있는 최고의 위치인 酒仙에 이른 사람은 李太白이나 杜甫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李太白은 62세에 장강에서 뱃놀이를 하는 도중에 주흥이 도도하여 강에 비친 달을 따려다가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 분의 평상 행동을 미루어 볼 때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치훈이 자신을 李太白과 동급인 酒仙이라고 스스로 선언하였으니 본인의 생각은 “李太白 쯤이야” 라고 생각했을까요?
생전에 이태백은 술 연못에서 한 손에는 게 다리를 들고 한 손에는 술병을 들고 마시면서 수영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답니다. 오래 전에 고인이 되신 선친께서 약주를 좋아 하셔서 즐기곤 하셨는데 숙부와 담소 중에 술 연못 대신 집안의 욕조에 막걸리 섬으로 채우고 게 다리와 술병을 드시고 이태백 같이 풍류를 즐기시게 하는 것이 뭐 어렵겠냐고 농담 삼아 말씀 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결국 두 분 다 마지막에는 그 즐기시던 술도 멀리하시고 노인성 치매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셨습니다. 정작 당신들은 고생인지 무언지 인식하시지도 못하였지만…….
역대 미국 대통령이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였지요. 1966년 11월 Johnson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당시에 가장 좋다는 Walker Hill에서 머물렀습니다. 만찬 중에 Johnson 대통령이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술인 Cutty Sark이라는 배 그림 술을 찾아서 미8군 Commissary까지 뒤지고 그 술을 구하느라고 온통 난리가 났다던 기사가 후일 gossip 거리로 신문에 난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1983년 7월 쯤 영국문화원에서 주최한 Diagnostic Oral Pathology Conference가 영국 Sheffield대학교 치과대학에서 열려 여기에 참석차 영국을 방문한 길에 Conference가 끝난 후 며칠 관광을 하였습니다.
자오선 0°인 Greenwich에 갔을 때 포구에 바로 Cutty Sark 배가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퇴역하여 박물관으로 관광객에게 개방하는 것을 보고 양주 Cutty Sark의 이름이 유래된 바로 문제의 배인 것이 생각나서 몹시도 반가웠었습니다. 이배는 1800년대의 몇 척 안남은 쾌속범선으로 상해에서 London까지 Tea를 나르던, 역사적으로 남아있는 유물이었는데 2007년 화재로 내부가 소실되어 지금은 복원 중에 있다고 합니다.
술하면 소련사람들의 음주취향을 빼 놓을 수 없지요. 1950년대에 Czechoslovakia에 민주화 물결이 일어나 진압을 위해 진주한 소련군이 Tank를 Vodka와 바꾸어 마셔버렸다는 해외 topic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 하였었습니다. Boris Yeltsin 소련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Ireland의 Reykjavik 공항에 기착하여 Ireland 수상과 정상회담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옐친은 비행기에서 Vodka를 너무 마시고 대취하여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공항에서 기다리던 Ireland 수상은 허탕을 치고 정상회담을 연기하게 한 큰 외교적인 결례를 했을 정도이니 그 나머지는 미루어 추정할만하지요.
통계에 의하면 소련 남자들은 0.5ℓ짜리 보드카를 연평균 170병을 마시고 있습니다. 이를 360㎖의 25도 진로 소주로 환산한다면 거의 하루에 한 병씩 소주를 마신 셈이라고 합니다. 이에 따라 러시아 남자들의 평균 수명은 지난 1987년 64.9세에서 1993년에는 59세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인구 10만 명당 알코올에 의한 사망자는 1986년 9.3명에서 1990년 10.8명으로, 이어 1994년에는 37.8명으로 무려 3.5배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어릴 때 집에 손님이 오시면 주전자로 막걸리 심부름을 하곤 하였습니다. 오가는 길에 마주치는 선술집이 생각납니다. 딸기코 같이 주독이 오른 주인 남자가 큼지막한 솥뚜껑을 거꾸로 걸어 놓고 장작불을 지펴가면서, 큼지막한 두부모를 썰지도 않고 통째로, 돼지비개로 바닥을 눌지 않게 비벼가면서 지지던 그 두부전이 어찌도 먹음직스럽게 보이던지, 잊히지 않습니다. 가끔은 호기심에 주전자 꼭지에 입을 대고 실례(?)를 하곤 하였는데 달착지근한 맛이 나곤 하였지요.
본격적으로 술을 먹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할 때부터입니다. 광화문의 학사주점에서 만나는 것이 젊은이들의 한때 유행이었습니다. 물론 학사도 아닌 학사의 줄에 들어선 대학생이나 학사의 줄에 들어서지도 못한 재수생들이 주로 고객이었지요. 드럼통을 엎어 놓은 탁자위에 자리 잡은 찌그러진 막걸리 주전자와 사기주발과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서 이 세상의 온갖 고뇌는 다 자신의 몫인 양 하는 표정으로 쉴 사이 없이 지껄여대던 고함, 거기에 더하여 매캐한 담배연기와 벽에는 마치 수십 년은 된 듯한 온갖 낙서가 당시의 막걸리 집 풍경이었지요.
재수를 하고서야 경희대 치예과에 입학을 하였지요. 3월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입학 동기생들이 토요일 강의가 끝나고 대낮부터 회기동 골목의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 막걸리집인 “낙지집” 안방에서 무릎을 포개고 앉아 입학을 자축하였지요. 신설과의 1회 입학생이었으니 우리를 축하해줄 선배가 없었지요. 낙지안주를 잘한다고 해서 낙지집이었습니다. 간판도 없고 한참 후에 지나다보니 누군지 단골손님이 손바닥만하게 “樂知집”이라고 간판을 붙여 놓아 애교스럽기까지 하였습니다. 당시는 생두부에 노가리 구이를 안주로 하여 주로 막걸리를 마셨는데 정작 낙지가 전문이라는 낙지집에서 낙지안주는 주머니 사정상 우리에게는 사치였습니다.
회비는 당시 돈으로 200원 정도였는데 한참 마시다가 볼일이 있어 조기퇴장하려면 문가에 앉아있는 친구에게 회비를 내고 나가곤 하였습니다. 파장을 하고 계산을 하고나면 마지막으로 남은 친구들이 입가심을 할 정도의 돈이 남곤 하였습니다. 그 낙지집과 경희치대 1회 동기생들과는 상당히 인연이 질겼습니다. 매년의 개강식, 종강식과 대표선출 등의 행사는 물론 그 외에도 원내생 시절 모든 갈등의 해결은 낙지집이 종착점이었습니다. 치예과 2학년 비교해부학실습시간에 닭을 해부하고 누가 제안한 사람도 없었는데 전원이 자신이 해부했던 닭을 한 마리씩 들고 낙지집으로 향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1972년 12월 학부생으로서는 마지막 시험인 졸업모의고사를 보던 날도 시험 후 우리는 모두 낙지집에서 보냈고, 더구나 그날은 밖에 눈이 내려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하였습니다. 학부시절의 마지막 시험을 치른 후의 허전함과 약간의 아쉬운 마음이 교차하여 모두 정신없이 취하여 미끄러운 회기동 골목을 누비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대학시절 필자는 입주가정교사로 호구지책을 해결하였습니다. 어느 날인가 과 회식 때 그날따라 정신없이 마시고 제정신이 아닌 필자는 어찌 집에 왔는지도 모르게 와서는 온통 토하여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쓰러져 잠들었습니다. 그리고 정신 차린 다음날 명목이 선생으로서는 학생들한테 면목이 없어 스스로 조용히 물러난 쓰라린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일단은 거처가 없어졌으니 여간 큰 타격이 아니었지요. 사실 그 집은 밀수합동수사반의 수사관 집으로 실은 온갖 밀수품의 창고(?)였었는데, 학생을 가르치다가 잠시 쉴 때면, 그 당시에는 일반인은 구경도 못해볼 시원한 외제 맥주를 가져다주어서 즐기곤 하였었습니다. 그 집에서 쫓겨난(?) 다음에는 내 주머니 사정 정도로는 도저히 그런 맥주를 마시는 것은 꿈도 못 꿀 지경이어서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구강병리학교실에 조교로 남아서 기초치의학을 전공하게 된 이후에는 순도 100%에 가까운 독일제 시약용 Merk alcohol로 비장의 과실주나 cocktail을 만들어서 가벼운 호주머니사정을 달래 곤하였습니다.
군대에 입대하여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는 동한 부수적으로 최전방에서 속전속결의 군대의 음주문화를 터득하고 왔습니다. 군인은 시간적으로, 심리적으로 극한상황에 처할 수 있으므로 빨리 끝내려고 폭탄주가 개발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필자가 근무할 70년대 말에는 “폭탄주”가 아직 생소하였고, “노털카”가 유행이었습니다. 소주를 맥주 컵에 가득 따라 마시고 털어서도 안 되고, 카해서도 안 되고, 잔을 잡으면 단번에 바닥보기를 해야 했으니 오죽 빨리 술에 취했겠어요! 임석상관이 잔을 좌로 돌리면서 “좌익척결”하고 다른 잔을 우로도 돌리면서 “우익보완” 했으니 왼쪽과 오른 쪽으로 잔이 분주히 왔다갔다를 반복하니 군대의 회식은 두 시간을 넘긴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참석자 대부분이 인사불성으로 쓰러졌으니까요. 군대에서 제대로 된 주당수련(?)을 받고 난 후로는 망태의 기회가 줄어들었습니다. 선생이라는 체면에 무의식적으로 조심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어디 술에 장사가 있나요?
1991년 가족을 두고 혼자만 방문교수로 Ann Arbor의 Michigan 치과대학에 다녀왔습니다. 집사람에게는 걱정 말라고 큰소리 탕탕 치고 옷가지와 코끼리 밥통 하나 들고 갔지요. 하지만 정작 이불도 가구도, 아무 것도 없이 우리나라로는 one room APT 같은 studio를 얻어 맨바닥에서 책을 베개 삼고, 오리털 파카를 이불삼아 보름을 지냈는데 처량하기가 짝이 없었습니다. 시차 적응이 안 된 것도 있겠지만 마음이 처량하니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새벽에 근처 공원에 산책을 갈라치면 그 시간대에 오는 사람은 대개 습관적으로 그 시간에 오게 마련이라서 만나는 얼굴은 밤잠이 없는 노인들만 만나기 마련이더군요. 필자가 머물던 아파트 옆에 있던 Kroger Mart에서 물 값보다 조금 비싸던 맥주를 다양하게 사다놓고 매일 저녁 맥주를 몇 can 마시면 조금 자다가 다시 깨어납니다. 결국은 싸구려 wine을 몇 잔 마시고 잠을 이루곤 하였습니다. 당시는 한국과 국교가 없던 중국의 청도 맥주가 Mart에 있어 신기해서 맛보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공부보다 요리와 세탁을 독학으로 터득하여 지금도 가족에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경희치대 치예과에 같이 입학하여 함께 술을 즐기던 “짤막이(윤병승 군)”는 오래전에 알코올성 치매로 고생하다가 갔고, “종갈이(전병찬 군)”는 뇌종양으로 갔고 이제는 안병준(기자협회회장 역임)군과 필자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학생 때 가끔씩 모여서 술을 즐기던 소위 “홍릉파”도 이제 모두 건강이 나빠 술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 정신 못 차리고 술을 즐깁니다. 이제는 그만 절제를 할 때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酒卒의 단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