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보건법, 누구를 위한 개정인가?
정신보건법이 “정신건강증진 및 정신질환자 복지서비스 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정신보건법이라 칭함)”이라는 명칭으로 개정되어, 2017년 5월 30일 시행될 예정이다. 정신질환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국민의 정신건강 증진을 도모하고자 하는 취지에는 적극 동의하나 이를 위해 정부에서 제시한 방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실망을 금치 않을 수 없다.
첫째, 정부가 인권보호의 미명하에 제시한 서로 다른 기관의 2인 의사 진단 체제는 “구속받지 않을 권리” 라는 인권보호의 핵심을 빗나간다. 환자 인권보호의 핵심은 입원 시 얼마나 많은 수의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느냐가 아니라, 인권을 침해하는 진료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 이를 적법한 절차에 따라 제지할 수 있는 안전망이 잘 가동되느냐 이다. 이러한 안전망의 역할은 정부가 강요하는 동료 의사들끼리의 감시가 아닌, 이미 많은 선진국에서 그러하듯 적절한 권위와 전문성을 가진 준사법적 기구에서 맡아야 한다. 선진국의 경우 의사의 전문적인 의학적 판단에 더하여, 사법기관이 환자의 환경을 고려해 입원 적절성을 평가하는 사법입원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정부는 이러한 부담을 피하고자 이미 부족한 진료시간으로 쫓기는 의료진에게 서로의 감시자 역할을 떠넘김으로써 책임을 회피하고 있으며, 지역사회의 정신건강을 책임지는 많은 수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의 진료공백을 야기하여 그들의 환자들이 받는 의료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는 2차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둘째, 개정 정신 보건법은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시행 내용으로 정신질환자들의 “마땅히 치료받을 권리”를 훼손한다. 개정 정신보건법은 입원의 조건을 자타해의 위험성 혹은(OR) 의학적 치료가 필요한 경우에서 자타해 위험성이 있으면서(AND) 의학적 치료가 필요한 경우로 변경하였다. 이 내용을 따르자면 입원 중에는 치료가 유지되나 약물 순응도가 떨어져 퇴원 후 자발적인 치료중단과 악화가 충분히 예상되는 환자들도 당장의 자타해 위험성이 명확하지 않다면 무조건 퇴원해야 한다. 이는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고 치료를 통해서 환자의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는 여지를 묵살할 수 있으며, “헌법 제34조의 1항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는 조항과도 첨예한 대립되는 부분이다. 또한 충분히 치료되지 않은 환자를 수용할 능력이 없는 사회로 내보내고, 그로 인한 문제를 환자와 지역사회가 고스란히 떠안게 한다. 현재 지역정신보건센터는 상상을 초월하는 과도한 업무로 파업이 이어지는 등 이미 포화상태로 정실질환자들을 보살펴 줄 지역사회 지지체계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준비되지 않은 사회가 충분히 치료되지 않은 환자를 맞이할 때 일어날 혼란과 이로 인해 정신질환자들에게 찍힐 사회적 낙인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셋째, 정신보건법의 졸속 시행은 치료의 핵심인 환자와 의사간의 신뢰관계를 훼손하여 치료의 질을 훼손한다. 정신질환자의 경우 환자와 치료자간의 강력한 치료적 동맹(Therapeutic alliance)이 환자의 임상적 예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가령, 세상 모두가 자신을 해치려는 음모로 가득하다고 믿는 정신질환자에게 치료가 필요하다고 설득하는 과정은 견고한 치료적 동맹 없이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이는 치료자가 환자에게 나는 당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당신은 안전을 위해 보호가 필요한 상태이며, 도와줄 수 있음을 설명하는 과정을 모두 포함한다. 따라서 치료적 동맹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형성되어야 하기에 전공의와 환자와의 치료적 동맹 형성에는 지도감독을 맡은 교수들조차 주의하여 개입한다. 그러나 현재의 정신보건법은 환자와 치료자 관계에 새로운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시간을 제한하고, 환자에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보다 서류작업과 법적 책임으로 얽매이게 하여 치료의 질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따라서,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정신질환자의 인권 및 안전 보호, 그리고 장기적인 삶의 질 향상을 위해 관련 부처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 한다.
첫째, 현장에서 직접 환자를 대할 정신과 의사들을 비롯한 정신보건서비스 제공자들과의 충분한 협의와 의견 수렴을 통해서 법안 및 시행령을 개정하라.
둘째, 환자 인권보호의 책임을 의료현장에서 고군분투 하는 의료 인력에게 전가하지 말고, 정신질환자들의 법적 권리를 수호 할 수 있는 전담 자원을 마련하라.
셋째, 무리한 퇴원 강행에 앞서, 정신질환자 탈원화를 위해 퇴원 후 환자들이 양질의 정신보건 서비스를 통해 치료를 지속하고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 인프라를 집중 강화하라.
환자뿐 아니라 모든 이의 인권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지켜져야 할 절대적 가치이다. 그렇기에 이는 어느 한쪽의 책임만이 아닌 사회의 공동 노력과 연대가 필요하다. 현 상태의 개정 정신보건법 시행은 환자, 보호자, 정신보건서비스 제공자와 지역사회, 그 누구의 인권과 안전도 제대로 보호 할 수 없다. 현재와 미래의 환자 인권과 안전의 수호자 역할을 해나갈 전공의로서 이에 대해 관련 부처들의 조속한 시정을 요구하는 바이다.
2017년 04월 11일
대한전공의협의회